[대한경제]
대구 히든스페이스갤러리에서 개인전 연 ‘빛의 화가’ 김성호 씨
해가 산 너머로 떨어지자 어둠이 호소와 숲을 메워가고 있다. 하늘엔 별빛이 얼굴을 내민다. 우주의 야릇한 빛이 열리는 풍경이다. 4년 전 작가는 깊은 산자락과 청평호수 인근에 위치한 경기도 양평 서종으로 찾아들었다. 현대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환한 빛으로 치환하기 위해서다. 프랑스 인상파 거장 클로드 모네가 빛을 그리기 위해 지베르니 정원을 가꾼 것처럼. 그는 어느 순간 모든 것을 멈추고 캔버스 위로 무대를 옮겼다. 국내 화단의 간판급 ‘빛의 화가’ 김성호 씨(60)의 이야기다.
‘‘빛의 화가’ 김성호 씨가 대구 히든 스페이스갤러리의 초대전에 출품한 작품 ‘새벽-홍콩’ 앞에서 팔짱을 끼고 웃고 있다.
◆대구 히든스페이스 갤러리 초대전
6일 대구 수성구 히든스페이스갤러리에서 개막한 ‘김성호-붓으로 잡아낸 새벽’전은 서종 작업실에 파묻혀 죽어라 그림에만 매달린 전업 작가의 빛에 대한 감성이 얼마나 풍요로울 수 있는가를 입증했다. 구작 위주의 1부는 오는 20일까지 열리고, 21일부터 다음달 6일은 2부격인 최근 신작들을 내보인다.
1층 전시장을 채운 20여 점의 ‘새벽 그림’은 문학적 상상력과 회화적 에너지를 단순한 선과 선명한 색채로 응축한 작품들이다. 불빛 아래 일렁이는 해변, 자동차가 꼬리를 문 도로, 네온사인과 휘황찬란한 조명이 깜박이는 홍콩 마천루 건물, 어둠을 가로지르는 체코의 소도시 등이 보는 이로 하여금 아스라한 기억의 편린들을 떠올리게 한다.
김씨는 “이번 전시는 정치·사회적으로 혼탁하고, 경제적으로 부대끼는 삶에서 ‘행복한 빛’를 퍼뜨리기 위한 시도”라고 했다.
◆생명체처럼 묘사한 도시의 여명
대구 태생인 김씨는 영남대 미대와 대학원을 졸업한 이후 암울한 시기를 보내던 시절 깜깜한 도시 풍경이 마음에 들어왔다고 한다. 당시에는 친구들이 취업이냐 전업화가의 길이냐를 두고 고민하던 때였다. 새벽의 가로등과 달빛, 건물들이 적막하게 다가와 스케치도 하고 사진도 찍었다. 새벽 그림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는 분방한 필치의 감각적인 붓 터치로 여명의 도시를 하나의 생명체처럼 역동적으로 묘사해 왔다. 하늘 위에서 보는 듯한 부감법을 적용한 색다른 기법 때문인지 그의 새벽 풍경화는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다.
‘빛의 화가’ 김성호 씨가 6일 대구 히든스페이스갤러리를 찾은 관람객들에게 자신의 작품 ‘새벽’을 설명하고 있다.
◆어두운 현대사회 ‘희망의 마술사 ‘자처
작가는 화업 40년 내내 수많은 사람들이 컴컴한 고난 속에서도 ‘희망의 두레박’을 건져올리는 ‘마술사’ 역할을 자처했다. 어두운 도심, 팽팽한 긴장감, 넓게 퍼져 있는 불안감 등 현대사회의 단면만을 골라 화면 깊숙이 채워넣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삶과 중첩된 물질 만능주의 사회 속에서 황폐해져가는 자신의 감성을 치유하듯 일종의 자가 처방전을 화면에 담아내려 했다.
“빛은 사람을 담는 그릇이죠. 현실은 그렇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빛을 원한다는 메시지를 담아내고 싶어요.”
오로지 붓끝을 ‘희망 미학’의 극점으로 몰아붙이는 이 작가는 도대체 어떻게 그림을 구상할까.
김씨는 “빛을 품은 새벽, 평화로움과 고요함, 빛의 역동성과 분주함을 담았다”며 “나만의 독특한 해석을 통해 기존의 정형화된 이미지에서 벗어나 빛줄기가 도심의 건물과 해변 등에 마술처럼 번지는 짜릿한 지점을 잡아냈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검정 파랑 노랑 회색 등 다양한 색감으로 풍경을 스케치한 다음, 빛줄기와 시간의 빠른 템포를 버무린다. 원경, 중경, 근경의 구도는 물론 하늘 위에서 보는 듯한 시점과 넓은 화면 대부분을 과감히 어둠으로 처리하기도 했다. 자연과 불빛이 하나가 된 풍경들은 그대로 화폭 속에 이야기로 들어앉는다.중첩된 굵은 선묘와 감각적이면서 자유분방한 여백의 미도 매력적인 요소다. 그는 “형상만을 보려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며 “작품에서 느껴지는 아우라를 포착하려 심혈을 기울였다”고 했다. 그의 그림이 묘한 향수나 추억, 고독감을 자아내는 까닭이다.
◆희망을 버무린 시적 아우라
작가는 문학적 감성을 극대화해야 소설이나 시처럼 여운이 묻어나는 것처럼 회화 역시 상상력을 최대한 응축해야 좋은 작품이 태어난다는 주장도 폈다. 단순한 외적 형태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이니 만큼 스피드한 리듬감과 스토리를 확장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얘기다.
미술평론가들이 그의 작품을 ‘희망의 후광’과 ‘여명의 리듬감’, ‘새벽을 여는 시적 아우라’라고 평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아무래도 인공조명은 삭막한 현실을 지워내고 싶은 꿈속의 지우개 같은 장치”라며 “그 꿈속의 지우개가 바로 내가 그린 그림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그가 작품 앞에서 던진 한마디가 긴 여운으로 남는다. “하필 새벽의 빛에 관심을 갖는 이유요? 어두운 것을 뚫어주기 때문이죠.”
김경갑기자